기다림의 끝
신세계 백화점 센텀시티 CGV에 생긴 아이맥스를 한번 맛본 뒤로는 다음번에는 어떤 대작 영화를 이곳에서 관람할까 하는 즐거운 고민을 종종 하곤 한다. 그러던 차에 최애 감독 중 하나인 놀란의 신작 영화, 오디세이 개봉 소식에 첫날부터 예매를 시도했고, 결과적으로 난데없이 불어닥친 오디세이 열풍 때문에 그 어떤 괜찮은 좌석도 구할 수 없었다. 무려 4주 동안이나. 어지간한 영화들은 1~2주 안에 괜찮은 좌석표를 구하는 데 큰 어려움이 없었는데, 이번 작품은 역시나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이름값을 한다는 느낌. 구석 자리를 선택하기에는 만만치 않은 아이맥스 푯값을 생각하면 쉽사리 손이 가지 않는 선택이었다. 결국 한 달을 꼬박 기다려서야 여유롭게 관람할 수 있었다.
이번 작품은 개봉 전부터 다양한 이슈가 있었다. 특히나 놀란답지 않은 인종 문제라든지, 영화적 구성의 문제점들이 다수 이야기되면서 아예 조롱거리가 되는 느낌도 있었다. 놀란의 팬인 본인조차도 선공개된 스크린샷등을 보면서 고개를 갸우뚱할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개봉 첫날부터 쏟아지는 극찬에 눈 녹듯 사라진 불평불만들을 보며, SNS에 쉽사리 휩쓸린 본인을 반성하게 됐다.

한 줄 평
“대서사시를 훌륭하게 스크린으로 옮긴 거장의 솜씨는 여전했지만, 테넷과 인셉션의 놀란을 다시 만나는 날이 돌아올까 하는 작은 의문이 남는다.”
상세 평
크리스토퍼 놀란이라는 감독의 초기부터 지금까지 살펴보면 어지간해서는 같은 장르 또는 같은 부류의 작품은 하지 않는다는 걸 알 수 있다. 흡사 우리나라의 봉준호 감독과 결이 비슷하다고 느껴진다. 배트맨 3부작은 애당초 하나의 이야기를 프랜차이즈 규모에 맞게 3개로 나눈 것이라 예외라 보면 될 듯하고, 실질적으로 우리에게 이름을 알린 ‘메멘토’를 시작으로, 그의 대중적인 인기를 완성한 다크 나이트 3부작, 그리고 거장의 이름에 쐐기를 박아준 인셉션, 놀란이 왜 놀란인가를 다시 한번 증명해 준 인터스텔라, 전쟁 영화조차도 놀란이 만들면 다르다는 걸 보여준 덩케르크, 본인의 영향력이 극대화된 상태에서 본인 하고 싶은 걸 모조리 쏟아 넣은 테넷에 이르기까지. 장르도 다르고, 테마도 다른 영화들을 줄기차게 놀란이라는 꼬리표가 달릴 수 있게 만들어온 감독의 역량이 대단하다. 그런 그가 차기작으로 삼았던 오펜하이머는 감독의 작가주의적 성향을 여실히 드러내 준 작품이었던지라 그 뒤를 이어 나올 오디세이가 도대체 어떤 식으로 표현될지 모두의 관심이 모이는 건 당연한 얘기였다.
A time of Apparent Magic이라는 자막과 함께 시작되는 영화는 ‘그 감독’이 정말로 마법이 난무하는 영화를 만들었을까? 라는 복잡한 심경을 가지게 해준다. 놀란은 오디세이아라는 고대 그리스 대서사시를 통해 이제는 이야기로만 남아버린 고대 문명의 명멸에 관한 이야기를 거장의 연출을 통해 사실감 넘치는 역사적 사실인 양 스크린에 풀어내고 있다. 오디세우스의 여정에는 외눈박이 거인이 등장하고, 포세이돈의 저주가 난무하며, 제우스라는 신에 대한 경외감과 경멸, 마녀의 마법, 각종 신화 같은 존재들이 등장하지만, 그 어느 장면에서도 일반적인 판타지 영화가 가질 수밖에 없는, 거짓되고 과장된 표현이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 지극히 사실적이라는 말보다는, 현실감이 넘치는 연출과 인물 구성, 사건의 진행이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이 그동안 유지해 왔던 기조와도 일맥상통한다는 소감이다.
어릴 때부터 그저 감탄만 했던 ‘트로이 목마’라는 계책에 대해서 가지고 있던 일종의 가벼운 카타르시스, 그러니까 통쾌하게 적을 속인 지략의 승리 같은 단편적인 소감밖에 없었던 나에게 실제로 이 작전을 수행했다면 어떤 고난과 역경이 있었는지, 그로 인해 어떤 시대적 흐름의 변화가 있었는지에 대한 놀랍게 잔인한 통찰을 보여주며 감독은 신화시대의 문명이 사그라드는 현장 속으로 관람객들을 초대하고 있었다. 외눈박이 거인 씬에서는 놀랍게 소름 끼치는 호러감을 선사하며 관객들을 희롱한다. 본인도 해당 장면에서 오금이 저리는 경험을 했다. 이 감독…. 공포 영화 만들었어도 거장 소리 들었을 거라는 뻘 생각이 든다. 이어지는 거인들의 학살 장면에서 느껴지는 무력감, 마녀 키르케의 저주씬이 가져다주는 불쾌함에 이르기까지 신화 같은 존재들이 이만큼 현실적으로 느껴진 영화가 있었나 싶을 정도다.
다만, 여기까지 관람하면서 계속해서 오디세우스라는 캐릭터에 대한 여러 가지 의문점이 집중을 방해한다. 애당초 놀란이 창조한 캐릭터가 아니고, 이미 정해진 서사가 있는 만큼, 본질적으로 가지고 있는 모순점이랄까, 묘한 캐릭터 성격을 감독이 너무 과하게 비틀기는 어려웠을 듯하다. 관람을 끝내고 오디세이아에 대한 여러 문헌을 살펴보고 나서야 원래 캐릭터가 이상한 놈(?)이었음을 알고 나니 놀란이 제시한 오디세우스는 차라리 상당한 설득력이 있다고 느꼈다.
이번 작품 역시 놀란 감독의 전매특허인 수미상관 퍼즐로 시작되고 마무리되는데 매번 볼 때마다 어떻게 이런 시나리오를 만드는지 놀라울 따름이다. 마지막 20여 분 정도는 3시간이 넘는 러닝 타임 내내 이어진 모험담을 끝내고 처절한 복수극을 펼치는데 타이트하게 짜인 컷들이 숨 쉴 틈 없이 몰아치며 살짝 집중력이 떨어지려 하는 관객들의 정신줄을 바짝 휘어잡는다.

다만 굳이 아이맥스를 고집할 필요가 있는 영상미였나…. 라는 물음에는 완전한 동의를 주기 조금 어려웠다. 물론 아이맥스의 압도적인 화면비로 재생되는 밀도감 높은 정보량은 훌륭하게 나의 두 눈을 휘어잡았고 관람 내내 빠져들 수 있었지만, 아래위가 잘린 일반 극장 비율로 본다고 그 감동이 크게 떨어질까? 라는 생각이 조금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분명 스케일이 큰 이야기들의 집합체였지만, 묘하게 인물에 집중하는 화면이라 그런 의문이 남은 듯하다. 어쨌든 무조건 아이맥스로 봐야 한다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아이맥스로 볼 필요가 없다는 전혀 아니니까 오해하지 말도록 하자. 이번에도 아이맥스의 거대한 화면은 내게 무조건 다음을 강제하고 있었으니까.
매번 놀란 작품들이 그러했지만, 이번 작품도 유독 음향 효과가 굉장했다. 외눈박이 거인 씬에서는 닭살이 돋을 만큼 전율이 흘렀고, 오디세우스가 활을 튕기는 장면에서 명징하게 울려대는 활 음은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어떤 효시와도 같았다. 그 외에 세세하게 디자인되고 재현된 온갖 사운드들이 시대와 세대, 그리고 신화적 배경을 넘어 생생하게 눈앞에서 펼쳐져 보이게 만들어줬다. 물론 아이맥스관의 뛰어난 음향 시설 탓이 컸겠지만 🙂
영화 관람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와 오디세이아 원문에 대해 이것저것 알아보고 나서야 이번 영화의 스토리 라인 자체가 크게 원작의 범위를 넘어서지 않았음을 깨닫고는 상당히 놀랬다. 그러니까 원작의 스토리라인을 최대한 따라가면서 디테일과 캐릭터 성격, 그리고 일부 각색을 통해서 이만큼 세련되고 거대한 스펙터클 덩어리라 할만한 작품을 만들어낸 것이다. 심지어 이미 여러 번 영화화가 됐었지만, 이번 놀란 표 오디세이에 견줄만한 작품이 있었나 싶다. 그만큼 뛰어난 완성도와 독보적인 매력을 어필하는 영화라 생각한다.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영화배우 중 한명인 맷 데이먼은 어린 시절 그가 가지고 있던 대책없는 문제아 이미지와는 달리 시간이 흐를수록 여러모로 친근한 이미지를 형성중인데 이번 작품에서는 고뇌하는 방탕아 역할을 기대 이상으로 잘해내고 있다. 맷 데이먼을 언급할때면 항상 그의 절친인 벤 애플렉을 함께 떠올리곤 하는데, 의외로 둘의 커리어가 전혀 다르게 뻗어나가는 모습을 보며 항상 신기함을 느끼곤 한다.
언론에서 이슈가 되고 있는 앨런 페이지…아니 이제는 엘리엇 페이지도 개봉전 떠돌던 루머와는 다르게 시논 역할을 짧지만 임팩트 있게 잘 소화해내고 있었고, 감독의 페르소나가 아닐까 싶을정도로 놀란의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앤 헤서웨이는 이번에도 적지 않은 비중을 완벽하게 충족시키며 존재감을 자랑했다. 아, 무엇보다 로버트 패틴슨, 이 양반 정말이지 매 작품마다 놀랍다. 테넷에서 브로맨스 넘치는 위트가이를 연기하더니 더 배트맨에서 회색이다 못해 아주 시커먼 너덜너덜 배트맨에 이어서 오디세이에서는 비열하고 야비하면서 소심함을 너무 잘 연기해내는 모습에 천상 연기자구나 싶었다.
해외에서 욕먹던 톰 홀랜드는 그가 아직까지 간신히 붙잡고 있는 ‘저질대는 애새끼’ 이미지를 마지막으로 뿜어내며 감독의 의도를 여실히 잘 표현한듯 한데 왜 욕을 하는지 모르겠다. 단지 그런 역할이라 톰 홀랜드를 채용했을 뿐인데 말이다. 그외에도 여러 익숙한 배우들 대부분이 열연하는 모습은 명장 아래 졸자가 없다는 걸 다시 한번 증명하는듯 했다. 오디세이에서 연기력으로 빈틈을 보인 부분이 있었나 돌이켜봐도 그다지 생각나는 부분이 없다. 어설프게 표현되기 쉽상이 외눈박이 거인마저도 기괴하면서 인간을 개미로 깔아보는 행위가 잘 느껴질만큼 좋은 연기였고, 키르케의 돼지씬은 위에서도 언급했지만 소스라치게 기분 나쁠만큼 굉장한 연기였다.
다만 해외에서 한창 시끄러웠던 dady 아빠 같은 대사들이 가지는 시의적 적절성같은 의미는 이해하지만 영어권 국가 아닌 우리나라에서는 자막에서도 조차 아버지로 통일해버렸기 때문에 그다지 와닿지 않는 내용이었다.
맺음말
관람을 마친 후, 친구와도 했던 말이지만 오디세이라는 작품의 완성도나 재미와는 별개로, 내 개인적인 취향의 놀란 감독 작품은 앞으로 접하기 힘든 게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들기 시작했다. SF 친화적인, 놀라운 내러티브 전개를 특징으로 하는 그의 작품은 물론 여전히 그런 특징을 가지고는 있지만 인셉션, 인터스텔라, 테넷으로 이어지는 100% 내 개인적 취향의 스트라이크 존에 들어맞는 작품이 또 나올까 하는 생각이다. 거장이 거장다움을 유지하면서 업계에 미치는 영향력이 커질수록, 본인이 하고 싶은 작품을 하려는 건 당연한 결과이고, 오펜하이머에 이어 오디세이를 보고 있으면 작가 주의할까, 아니 그와는 조금 결이 다르지만, 어쨌든 놀란이 앞으로 하고 싶은 영화가 인셉션이나 인터스텔라 같은 작품은 아닐 거 같다는 불길한 생각이 든다. 물론 아니길 바라며, 테넷 같은 작품이 더 나오길 바라 마지않지만. 어쨌든 지금의 내 솔직한 심정은 그러하다는 말을 끝으로 맺음을 한다.
ps: 자, 다음은 듄3 !!! 어서 와라 겨울아!!

